나는 삶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아니 봄이라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시골에서 아기자기한 나의 삶을 꾸려나가고 취향을 담은 아기자기한 그릇과 제철 식재료가 넘치는 시장이 있다. 숲에는 봄나물이 넘실넘실 피어있고, 한바구니 가득 따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빵반죽으로 만드는 하루가 있다. 어렸을 때 만화에서 봤던 ‘빨간 머리 앤’에서 나올 법한 장면들이 내 삶을 메운다. 나의 방식대로, 아이들도 공부에 큰 스트레스 없이 마음껏 뛰놀고 책을 읽으며 보내는 봄이다. 꽃마다 피는 시기가 있으니, 불안해하지 않고 우리의 박자에 맞게 살아가는 것. 체코에서 살면서 깨우친 것이다.

가장 나다운 것을 찾아가는 여정에 우리가 있다. 그러니 모든 것엔 제철이 있다.

나의 존재를 조건 없이 응원해 줄 사람. 그런 사람을 나의 팬이라고 말한다면, 아무래도 내 팬은 부모님이 될 것 같다. 내 팬이 부모님이라고 해서,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서른 중반까지만 해도 나는 부모님이 사랑 줄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아빠는 일만 하는 가부장적인 사람, 엄마는 글로 모성애를 배운 사람이었다. 특히 엄마는 자주 머리가 아프고 피곤했다.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예민했다. 엄마는 강박도 있었는데, 어린 내가 우유를 마시다 흘리면 송곳처럼 뾰족해져 나를 다그쳤다. 우유가 마룻바닥에 스며들면 썩은 내가 날 거라면서 서둘러 걸레질했다. 거칠게 마룻바닥을 훔치는 손을 보며 나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휩싸였고 모든 것을 조심하는 아이로 자랐다. 엄마는 규칙이 많은 사람이었다. 과자 부스러기는 흘리면 안 되기 때문에 항상 손을 받치고 먹거나 식탁에서 먹어야 했고,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면 바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집안일에도 무너지면 안 되는 자신만의 규칙이 있어서 온 가족이 그걸 지켜야 했다. 지키지 못한다고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낸 건 아니지만 엄마의 깊은 한숨과 구겨진 미간을 견뎌야 했다.

일주일 내내 아기와 붙어있다가, 주말조차 일을 한다는 이유로 방문을 닫고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생활이 시작되자 금세 번민에 빠졌다. 조금이라도 벌 수 있을 때 더 벌어두자는 나, 미래를 고민하며 뭐라도 더 성취하려는 나, 아기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은 나, 그저 푹 자고 종일 책을 읽거나 영화나 봤으면 하는 나. 수많은 내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밀려간다.

대체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100m 달리기를 하듯 인생을 사는지 모르겠다. 겨우 몸을 일으켜 시작한 하루를 숨 가쁘게 뛰다가 내일 달릴 코스를 미리 짚으며 잠에 든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는데 내 발 밑에는 경력이 단절될 수 있다는, 자칫 내가 알고 속해있던 사회에서 잊힐 수 있다는 불안이 뜨거운 불판처럼 달궈져 있다. 그리하여 나의 매일은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 달리는 단거리 경주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를 때는 최근 읽은 책들에서 밑줄친 부분을 살펴본다.

‘가족이라는 거 이상하지 않니. 가장 못생긴 서로의 얼굴을 알면서 빛나는 모습 앞에 둔하기도 하고, 편한데 불편하고, 짜증 나는데 애틋하고. 돌이켜 보면 나는 가족에게 가장 인색했다.’ - 고상하고 천박하게 중에서…

내가 느낀 존재와 관계의 모순을 이 문장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웠다.

내가 결혼을 하여 꾸린 핀란드의 새가정. 그리고 나를 결혼하기 전까지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준 한국에 사는 가족. 밑줄친 문장들은 특히 한국의 가족에게 더 어울린다.

안온한 성을 박차고 나와야만 만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빛이 산란하는 과정을 보며 삶의 찬란함을 비로소 마주하는 것처럼. 내 이름, 직업 '나'를 수식하던 이름에서 온갖 의미로 퉁친 '엄마'로 불리면서 매일 내 안의 껍질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뭐랄까. 액체 상태의 무언가를 희미하게 지탱하는 얇은 내막 하나만 달랑 남은 맨 몸으로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하는 기분. 그럼에도 너라는 중심추를 안고 있어 묵직하고 따뜻했다. 천적으로부터 고스란히 노출된 허허벌판에 서자 모든 시야가 또렷해졌다. 지켜내야 할 존재가 있다는 건 삶의 이유가 귀속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