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에포크 '타인의 취향 feat. 옆집 아줌마가 영화 보는 법'

저는 프랑스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리옹에 살고 있어요. 파리에서 기차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랍니다. 저희 집은 프랑스식으로 하면 0층, 한국식으로 하면 1층에 위치한 아파트입니다. 부엌 옆에 통유리로 둘러싸인 베란다가 있고, 베란다 앞에는 작은 정원이 딸려 있어요. 정원 문을 열고 나가면 아파트 공동 풀밭이 나오는데, 봄이면 데이지가 한가득 피고 그 뒤로는 라일락이 풍성하게 흐드러진답니다. 바람이 솔솔 불고 선선한 날에는 차가운 공기 속에 퍼진 라일락 향기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풀밭 한구석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다닥다닥 심겨 있어서 아이들에게 멋진 아지트를 선사합니다. 이 공간을 포기하지 못하는 남편 덕분에(혹은 때문에) 네 식구가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복작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영화 리뷰 없는 영화 글쓰기 

처음에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학교에서 단편영화를 만들며 연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제가 관심 있는 주제가 쇼트, 편집, 미술, 배우, 음향 등의 요소로 구현되는 마법을 보는 일이 재밌었어요. 그때는 어떤 상황을 겪어도 그것이 머릿속에서 하나의 시퀀스가 되는 경험을 하곤 했어요. 프랑스에서 영화 공부를 하면서는 좀 더 철학적이고 분석적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법을 배웠어요. 전에는 평론이 단순히 영화를 평가하는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공부하면서 평론도 하나의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지요. 석사 논문 중 하나가 <홍상수 영화 속 시간들>이었는데, 한 작가의 영화 세계를 시간을 통해 분석하면서 작가의 세계도 공부했지만, 시간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영화를 보다가 마음에 와닿은 장면이나 대사를 저장하는 습관이 있었어요.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필사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죠. 일부러 글감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자료를 찾기보다는, 그동안 저장해둔 장면이나 대사 중에서 글쓰기 모임 참가자분들이 흥미롭게 생각하실 만한 것들을 찾아 글감으로 제시합니다. 장면 저장이 어려운 경우 그 장면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영화 속 역할을 생각해 보고 키워드로 바꿔 제시해 드리곤 해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로 인터뷰 전문을 확인해 보세요)

아이가 4살이던 어느 겨울. 생각해 보니 아이는 그때도 나를 지켜주었다. 하필이면 남편이 해외 출장을 떠난 첫날 오후, 현관에서 택배 상자를 뜯다 허리를 삐끗한 나는 그길로 드러누워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었더랬다. 근방에 일가친척 없음. 집에 있는 사람은 4살배기 아이와 나 단둘뿐. 현재 상황을 머리로 요리조리 굴려보던 나는 어쩔 수 없이 119에 연락을 한 뒤 아이에게 양말의 위치를 알려 주고, 양말을 좀 신겨 달라 부탁했다.

우리 꼬꼬마 아들은 낑낑거리면서도 참 열심히 내 두 발에 양말을 꽂아주었다. 현관 바로 앞에 있는 아이 방에 너덜거리듯 드러누워 두 발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양말을 보고 있노라니 이 상황이 황당하면서도 아이가 귀여워 그저 웃음만 나왔다. 구급 대원이 오기 전까지 아이는 내 요청에 따라 기저귀 가방으로 쓰던 커다란 배낭을 질질 끌고 와 지갑도 넣고, 물병도 넣고, 간식도 넣었다. 마침내 아이가 자신의 외투도 챙겨올 즈음 구급 대원분들이 도착해 나는 이불째로 들것에 옮겨져 아파트 입주민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구급차에 실렸다. 그리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나는 보았다. 들것과 이동식 침대 왼편에 순간순간 올려져 있던 자그마한 아이의 손을. 아이는 구급 대원 분들이 말리기 전까지 항상 나를 지켜주듯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응급실에 도착해 이곳저곳 떠돌며 검사를 받으러 다닐 때에도 마찬가지. 아이는 한결같이 침대 가드를 꼭 잡고 내 곁을 지켜주었다. 아주 크고 든든하게.

인간관계에서는 누군가에게만 맞춰주면 된다고 더 이상 배울 것 없다고 자만했던 내게 너는 좀 색다르더라. 정말 고맙게도 너로 인해서 많은 걸 배웠어. 나는 SNS에서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흔히 자행되는 스토리 숨기기도 알았고, MZ들의 산물인 카카오톡 멀티프로필로 특정 대상에게 보이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걸 알았어. 덕분에 세상에서 내버려진 기분은 혼자 다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

나는 네 덕에 밥을 먹지도, 잠에 들지도 못했던 적이 꽤 오래였어. 살이 얼마나 빠졌던지, 덕분에 내 주변 친구들이 많이 시달려야만 했었단다. 온통 내 생활이 너로 뒤덮인 적이 있었어. 내가 사랑해마지않는 내 아이와 보내는 시간들도 뒤로 미뤄놓을 정도로. 너를 미워하고 밀어내는데 모든 에너지가 쓰였단다. 주변 친구 중 현자 같은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너는 지금 합법적 불륜을 하고 있구나.” 라고 하더라고. 어떤 우정의 색깔은 사랑과도 닮아있으니까. 그래, 나는 너를 사실 아주 많이 사랑했었나봐. 나를 크나큰 행복감에 잠기게 하는 사람은, 그 반대로 나를 처절한 절망감에 잠기게도 할 수 있다는 걸 너를 통해 크게 배웠다.

잠들기 십 분 전, 나와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모두 마친 뒤 안방에 있는 큰 창문을 열고 바깥 구경을 하곤 한다. 아이들과 나는 창틀에 팔을 기대고 나란히 앉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별자리를 구경하거나 지나가는 비행기의 수를 세어 보기도 하고 겨울의 흙냄새를 맡아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특별할 것 없는 짧은 시간이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다는 이유 만으로 혼자서 봤을 때 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밤하늘이 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바람결을 타고 날아오는 저녁바람의 냄새는 하루동안 쌓인 근심걱정을 잊기에 충분할 만큼 강렬하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내는 평범한 시간. 내가 찾은 또 하나의 행복이다.

재밌다. 물론 종종 지루하고 몸도 마음도 지친다. 그래도 점점 재미가 있다.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즐겁다. 아기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지금의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생각하는데, 이게 꽤 흥미롭다. 아기가 말을 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 선택하는 일이 잦아진다면 그의 모습에서 내 장점과 단점을 더 쉽게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자식이니 나를 닮아서라기보다는 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거다.

요즘 즐겨하는 게임 애플리케이션은 매일 저녁 8시 45분쯤 되면,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묻는 알림을 보낸다. 최대 4장까지 사진을 올리고 오늘의 기분을 슬픔, 보통, 즐거움을 나타내는 표정으로 기록할 수 있다. 나는 주로 '보통'을 선택하는 성격인데, 최근에는 별 일이 없다면 '즐거움'을 고른다. 내 변화가 나도 놀랍다. 아기와 함께 웃는 시간이 단 몇 분이어도 나는 오늘 하루를 즐거웠다고,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마음공부를 시작하고 한참 지나서 삶의 고통과 두려움을 환영 하기로 다짐 했다. 달콤하고 좋아보이는 것들은 쉽고 금방 사라진다. 그것에 환멸을 느껴 마음공부를 시작했지만 두려움을 환영 해보자고 다짐하는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두려움을 마주한 고통 속에서 찾은 자유로움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 자유를 한번 경험한 사람은 고통을 느끼며 기뻐하는 아주 변태적이고 의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고통이 결코 고통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은 운동 후 근육 조직이 갈기갈기 찢어져 엄청난 근육통을 경험하며 환희를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래서 나는 마음도 근육이 있다 믿는다. 어떤 마음도 받아들이는 힘. 마음근육.

오늘 나는 어떤 마음근육을 사용했나? 어떤 쪽의 마음 근육을 더 키워야 할까?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거울이다. 나의 두려움을 아이들이 잠들고 조용히 생각해본다.

‘다음 주 남편 출장인데 이틀 독박이다. 두렵다… 메뉴 선정부터 미리 해놔야겠다!’

몰랑한 손이 부항과 혈침으로 벌집이 된 어깨를 토닥인다. “이러다 엄마가 죽을까 봐 걱정이야.” 나는 꼬마를 꼭 안으며 스스로를 토닥인다. 내가 볼 수 없는 등짝을 가여워하는 마음이란. 내 심장에 제3의 눈이 생긴 것만 같다. 성악설 신봉자가 되었다가 끝끝내 성선설로 돌아서는 건 오로지 이 작은 온기 때문. 작은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는지 매일 들어도 빈틈없이 경이롭다. 꼬마의 심박수 따라 삶을 향한 의지가 덩달아 콩콩 수혈된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치과에 덜 데려갈 심산으로 양치까지. 너의 서툶을 핑계로 나의 독립을 미룬다. 샴푸는 10초 컷. 숨어있던 배냇머리를 문지를 때면 해초 속 보물을 찾는 기분이랄까. 토끼 앞니만 한 대문니는 암만 봐도 귀엽다. 엄마 힘내라고 만들어준 ‘문토끼 송’이 집안 공기를 덥힐 때면 바닥을 드러낸 인류애가 다시금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