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 #1 핀란드의 손으로 생각하는 삶으로부터 

1. 찰흙을 찾아서

동네 문구점에 가면 쉽게 살 수 있을 줄만 알았던 찰흙이 에포크의 사전 준비물이었어요. 손으로 생각하는 삶에 대해 귀로만 듣기에는 아쉬우니까요. 동네를 헤매다 다이소에서 테라코타 색으로 염색한 지점토를 겨우 구했는데요.하나라도 빠뜨릴까 매일 꼭꼭 눌러쓰던 알림장의 준비물이 개별 준비에서 학교에서 일괄 지급으로 바뀌다 보니 찰흙을 구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요. 둘러 보면 흙을 밟고 만질 기회도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안전상의 이유로 놀이터 바닥은 우레탄으로, 편의를 내세워 콘크리트로 바뀐 땅을 내딛으면서 비오는 날엔 질퍽해지던 흙바닥이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요.

2. 나만의 고요함을 찾아서

핀란드의 작업실에서 물레를 돌려 사과컵을 만드는 사이 줌 화면 너머에서는 각자의 평화를 상징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빚어내는 중이었어요. 서로를 안아주는 가족, 잠들기 전 데굴데굴 굴러 다니는 아이를 떠올리며 만든 도토리. 아이와 함께 '나만의' '평화' '고요함'이라는 키워드를 꺼내고 생각해 본 다음 손으로 조물조물 만드는 건 처음이었어요. 이렇게 무해한 시간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헤쳐 나가기 바쁜 일상에서 고요한 순간을 만들어 낸다는 건 지점토의 몰랑한 점성만으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만 합니다. 

3. 내 인생의 오브제를 찾아서

"사과나무가 있는 집에서 남은 평생을 살면서 도자기로 사과를 만들다가,

죽어서 사과나무 아래 뭍히면 흙이 되어 언젠간 사과로 다시 태어나길 꿈꿉니다."

사전 인터뷰에서 에디터 준이 남긴 문장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어쩌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속의 우리는 실체가 없는 무언가가 되기를 갈망하며 실루엣만 가늠되는 뒷모습을 평생 뒤쫓다 끝나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좋아하는 것은 절로 닮아가는 건 중력과 같은 이끌림이 아닐까 . 나로 잘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그래서 포텐님의 사과는 무엇인가요?

“큰딸은 살림 밑천이래.”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였을까. 중고생 시절에는 없는 용돈을 긁어모아 어버이날 카네이션 바구니를 샀고, 지지리도 가난했던 대학생 시절에도 명절이 되면 선물세트를 사들고서야 부모님댁을 찾았다.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내가 할 도리를 다하고, 열심히 공부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을 줄 만 알았던 참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첫 직장에 입사하고, 그 월급을 엄마가 관리해 주겠다 나섰을 때 알았다. 아, 이 사람에게 나는 정말 딸이 아니라 살림 밑천이었구나. 중고등학교 시절 학원은 대부분 성적 장학금을 받아 다녔고,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는 과외와 아르바이트, 파견사원 일을 해 주거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첫 직장에 입사했을 때, 정장 한 벌 살 돈은커녕 신입사원 연수 3개월 중 그 첫 달을 버텨낼 집세와 생활비조차 없어 학교 선배와 동기에게 돈을 빌려 정장을 사고 연수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관심조차 없던 엄마가 이제 와서 내 월급을 관리해 주겠다고.

기나긴 설날 연휴였다. 누가 주말과 명절연휴를 임시공휴일로 똑 연결해버렸는지, 양가로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나의 휴일을 챙겨 먹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친정은 멀고 시가는 가까워서, 항상 친정가는 기차는 티켓팅을 해야 하는데, 영 실패해 미친 듯이 기차 어플을 새로고침을 누른다. 제발, 나와라, 나와라, 나와라, 취소표. 잡았다! 기어이 잡고 나니 영 마음이 편해졌다.

어느덧 귀성길은 기차를 타고 가게 된 지 오래였다. 캐리어 하나로 갈 수 있을 만큼 아이의 짐은 이제 단출해져서 굳이 누군가의 독박 운전으로 막히는 길은 짜증내며, 막히지 않는 길은 초조해하며 가기 싫어진 것도 크다. 기차에 이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자기 집을 향해서 연어처럼 거슬러가는 건 정말 진풍경이다.

1월 6일 주현절에 프랑스에서는 갈레트 데 루아라는 케이크를 먹는 전통이 있어. 갈레트 데 루아는 ‘왕의 케이크’라는 뜻이야. 이 프랑스의 전통 놀이는 한국의 왕게임 비슷한 거야. 케이크 안에 페브(Fève)라고 하는 작은 도자기 인형이나 콩이 숨겨져 있는데 이를 찾은 사람은 하루동안 왕관을 쓰고 왕이나 여왕이 돼. 프랑스에서는 페브를 찾은 사람에게는 일 년간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어.

보통 1월 1일부터 빵집에 가면 이 갈레트 데 루아를 팔기 시작하고 1월 단 한 달 간만 맛볼 수 있어. 때문에 이 케이크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들은 1월 동안 이 케이크에 파 묻혀 산단다. 이 케이크는 페스트리 빵 속에 아몬드 파우더와 크림으로 속을 채워 만드는데 페스트리 위에 나뭇잎 모양이나 소용돌이 모양을 넣어 장식해. 이 무늬는 프랑스 왕가의 왕관 장식과 유사해 왕을 상징하는 상징적인 이유로 사용되고 있어.

作心三日. 한자로 써놓으니 제법 그럴듯합니다. 글자 하나하나 생김이 귀엽기도 하고요. 새해라면 한국인이라면 분명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리는 사자성어랄까요.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엄마의 삶을 맞닥뜨린 저에겐 작심삼일조차 없는 새해가 두 해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24시간, 1주일, 1달, 1년을 어떻게 쓸 것인지, 이제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정할 수 있는 건 아니더군요. 무엇보다 아기에게 순조로운 일상을 보장하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과업을 함께 해나가는 반려인과도 호흡을 맞춰야 하고 말이죠.

물론 15개월을 하릴없이 흘려보내기만 하지는 않았아요. 지난해 이맘때, 나는 습설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며 앞으로 남은 생애를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중심에 두는 일상에 꽤 익숙해지는 한편, 다시 본격적으로 바깥세상을 향해 출항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핀란드의 새해 맞이 풍경은 마트에서부터 시작된다. 마트 입구에 커다란 폭죽 가판대가 생기고 현란한 폭죽의 이름들이 새겨진 카달로그를 나누어준다. 우리도 카달로그를 하나 받아 마트를 나왔다. 메가톤 팡파레와 자이언트 킹같은 어마무시한 이름 사이에서 첫째 레온이는 고민한다. 카이사르는 어떤 것인가라고 묻는 아이에게 나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광란의 불꽃 사진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 트램에서 봤던 광고 하나가 생각났다. 커다란 눈에 호기심과 기대를 가득담아 폭죽 카달로그를 보고 있던 아이와 우크라이나의 건물폭파 장면이 겹쳐졌다. 불꽃은 누군가에게는 기쁨이 누군가에게는 형용할수 없는 슬픔이 될수 있음을 광고를 통해 보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마음이 무겁고 코가 시큰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날 하루종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유독 긴 구정 연휴가 시작하기 전. 금요일 오후였다. 키즈카페에 아이를 풀어 놓고 같은 반 아이 엄마와 밀린 근황을 나누는 중이었다. 어린이집에서부터 만났건만 두 녀석이 올해 같은 반이었고 심지어 베프라는 것조차 학년이 끝난 시점에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