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부터 즐겨 만들던 음식이 하나 있다. 바로 계란 볶음밥이다. 오른편 작은 창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오는 할머니 댁 주방에서 또래 친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고 깡마른 꼬맹이가 새까만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계란과 밥만 넣어 만든 계란 볶음밥. 한 유명 살림 전문가의 SNS 피드에서 ‘소울 푸드(Soul food)’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던 날, 나는 그 무엇보다 먼저 듬성듬성 연노란색이 섞인 그 투박한 계란 볶음밥을 떠올렸다.

그 시절 나는 어쩐지 우울하거나 입맛이 없을 때면 항상 계란 볶음밥을 만들어 먹고는 했다. 화려한 재료가 들어간 메뉴는 아니었지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계란 볶음밥은 언제나 마음을 푸근하게 안아주듯 따뜻했고 꽉 막힌 듯한 목구멍도 활짝 열어줄 만큼 맛있었다. 그 뒤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과거의 꼬맹이는 엄마가 되었고, 꼬맹이를 닮아 작고 깡마른 어린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한 요리책에서 계란 볶음밥 레시피를 발견한 엄마는 반가운 마음에 당장 프라이팬을 손에 들었다. 

그러고 보면 아이만큼 나도 자주 넘어지는 것 같다. '마음의 넘어짐' 말이다. 파릇파릇 청춘으로 살고 싶다가도 어느 날 내 마음을 바라보노라면 폭싹 늙어 있음을 보게 된다. 분명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음에도 자신감을 잃은 그런 날, 양육자로서 패배감을 맛보는 그런 날- 그때는 모든 걸 망쳐버린 것만 같은 초라한 기분에 휩싸이다 몇 날 며칠을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처럼 '마음의 넘어짐'을 겪고는 한다.

그럴 때 나는 아이에게 하듯 '괜찮아?'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하고 반문해 본다. 자기 연민에도 빠져보지 못한 채 어영부영 그 시간을 보냈던 것만 떠오른다. 상처가 낫는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결국엔 회복의 맛도 경험하며 살아야 할 터인데, 나의 경우는 넘어지는 일에만 주야장천일 뿐, 그 과정을 고스란히 마주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살아내야 하니까 버틴 것인지, 누구나 다 그런 거겠지 하고 가벼이 여긴 것인지, 그건 모르겠다. 다만 오롯이 봐주지 못했다는 것과 그 과정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보낸 탓에 '똑같은 넘어짐'과 '똑같은 마음 상함'이라는 멈추지 않는 대관람차를 타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이번 여행은 망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십분도 채 못 걷고 얼음물을 사러 슈퍼에 들어가며 생각했다. 아이들이랑 이 날씨에 관광지라니 우린 정말 미쳤어. 베네치아는 소문대로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고, 곳곳의 아름다운 골목과 물길을 잇는 다리까지 상상 속 그대로였다. 아니 더 아름다웠다. 유럽을 돌아볼 만큼 돌아봤지만 베네치아 만큼 아름답고 특별한 도시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미쳤다. 여름 이탈리아는 한국만큼 덥고, 정말이지 녹아내릴 것만 같았는데, 우둘투둘한 돌길과 계단과 다리 덕분에 유아차를 끌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점점 익어가고 버스도, 택시도 없고 수상버스, 수상택시만 있는 곳에서 오로지 “걷는다”라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오전을 아이들 투정을 받아주고 몇걸음 떼고, 젤라또를 사 먹다가 다 보내고, 점심에서야 겨우 레스토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 저는 왜 아이를 낳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전 절대 안 낳을 거에요."

세상에 만연한 ‘혐오’ 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에 하나를 마주친 순간이었다. 혐오를 마주하게 되면 내 방식은 거진 하나였다. 대충 동조하는 척 회피하는 것. 그리고 곱씹는 것. 그렇게 얘기하지 말걸. 그렇지만 이런 말에 하나하나 상처받기엔 나는 너무도 오랜 시간을 고민했고, 결정했기에 더더욱 말할 수 있었다. 이 사람도 별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고, 내게 별 의미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냥 나도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